BY McKenzie Wark in Opinion | 01 SE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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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253

DJ로서의 예술가, 예술가로서의 DJ

휴대폰을 내려놓고 온전한 듣기를 요청하는 매켄지 워크와 함께 줄리아나 헉스터블의 DJ 셋에 맞춰 서킷 게이들과 인형들 사이를 누비며 춤을 춰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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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Kenzie Wark in Opinion | 01 SEP 25



This piece appears in the columns section of frieze 253, ‘Music’

뉴욕 브루클린 어딘가의 소규모 레이브 파티에 왔다. 댄스 플로어는 작고 사람들로 붐빈다. 너무 덥고 습한 나머지 레이브 빗물이 뚝뚝 떨어진다. 달콤한 사탕 색깔 불빛 아래 나는 웃통을 벗은 채 땀에 젖은 가슴을 흔드는 서킷 게이들 무리 속에 있다.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나도 웃옷을 벗는다. 가끔가다 털북숭이 가슴이 내 젖꼭지를 간지럽힌다. 목표점은 플로어 앞쪽이다. 지금 이 파티처럼 흥이 차오를 경우 내가 춤추기를 가장 좋아하는 위치다.

나는 맨 앞까지는 미처 도달하지 못하고, 한 줄 뒤에 섰다. 내 앞에는 ‘인형들(dolls)’이 있다. 그들을 지나가려 굳이 애쓰지 않는다. 인형들에 대한 예의이자 어차피 매끄럽게 지나가지 못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인형들은 나처럼 트랜스 여성이지만, 나는 그들이 아니다. 인형들은 특별하다. 밤의 신성한 존재들이다. 인형들이 신나게 춤을 추고 있다. 오늘 아침에 많이 합류한 것 같다. 인형들 앞에는 베이스 빈이 있는데, 그들의 허리춤 정도까지 올라온다. (인형들은 키가 크다.) 그 위에 인형들의 핸드백 더미가 쌓여있다. 핸드백 요새 너머서는 뜨겁게 달궈지고 있는 CDJ 기기 4대와 믹서기가 있다. 그리고 그 일렬의 장비 뒤에 DJ가 있다. 그녀는 줄리아나 헉스터블(Juliana Huxtabl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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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나 헉스타블, 2025, 퍼포먼스 현장 기록, NEUROTICA, 런던. 제공: Courtney Frisby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헉스터블의 로컬 팬들이거나,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그녀가 하는 무엇이든 즐길 준비가 된 사람들이고, 그녀도 알고 있다. 지금은 테크노 트랙 2개가 재생되고 있는데, 그 위에 앰비언트 노이즈 트랙이, 그리고 그 위에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시를 활용한 샘플이 섞여있다. 분위기와 속도가 빠르게 뒤바뀌는 키네틱(kinetic)한 셋이다. 우리는 완전히 몰입되어 있다. 우리는 음악을 몸으로 온전히 흡수하고 열띈 에너지를 돌려준다. 내 뒤에는 서킷 게이 한 쌍이 서로에게 완전히 빠져 있는 나머지 나를 인형들 쪽으로 밀어낸다. 우리 모두 땀을 흘리고 있지만, 그 둘의 몸에서는 몰리의 황홀함이 증발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밖에 우리가 아는 사실은 별로 없다. 우리는 레이브 속에서 끓는다. 인간의 잡음은 날아가고, 남은 것은 진득하게 졸여진 짐승적 본능뿐이다. 

헉스터블은 어떤 매체든 다룰 줄 알것만 같은 예술가이고, 지난 몇  년간 그래왔다. 그녀의 글을 애정하는 사람으로서, 그녀가 더 많은 글을 써주길 바란다. 헉스타블은 시각예술가이기도 하고, ‘Tongue In The Mind’라는 밴드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그녀의 모든 행보가 흥미롭다. 만약 헉스타블이 마임이나 도예 작업을 한다면 기꺼이 보러 갈 것이다. 헉스타블은 동시대의 흐름을 감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의 기원이 어디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우리의 몸이 어디로 돌아가는지, 달콤한 인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꿰뚫어 본다. 그녀의 모든 활동에 관심이 가지만, 유난히 DJ로서의 헉스터블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현시대의 소음에 그녀만의 방식으로 반응하는 매개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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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나 헉스타블, 〈Untitled (Psychosocial Stuntin')〉, 2015, 컬러 잉크젯 프린트, 102 × 76 cm. 제공: 작가 및 Project Native Informant, London

휴대폰이 보편화되면서, 우리의 감각 체계는 균형을 잃었다. 어디를 가나 휴대폰 화면을 얼굴 앞에 든 사람들 뿐이다. 손 안의 납작한 화면을 스크롤하며 저화질 이미지와 불쾌한 소음이 뒤섞인 동영상을 시청한다. 미디어 환경은 평면적인 이미지, 파편화된 텍스트, 제스처로 변환된 영상을 선호한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축소된 이미지의 범람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다.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위대한 미학적 과제는 새로운 감각의 조합을 통해 완전히 다른 감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일테다. 레이브는 이러한 감각 체계의 한 형태를 제시한다.

좋은 레이브의 핵심 조건은 모두가 휴대폰을 잠시나마 잊고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물론 DJ 바로 앞에서 빅 베어가 30분 동안이나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예외 상황도 있다. 나는 호기심에 그이 쪽으로 다가가 화면을 엿보았다. 그라인더 앱을 사용하고 있었다. 매칭에 성공한 듯, 곧이어 다른 남자가 접근했고, 둘은 함께 플로어를 나섰다. 다크룸으로 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크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크린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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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나 헉스타블, 〈Interfertility Industrial Complex 5〉, 2019, 스틸컷. 제공: the artist 및 Reena Spaulings Fine Art, New York. 촬영: Joerg Lohse

아방가르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군사체제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결탁한 군산엔터테인먼트복합체(military-entertainment complex)의 최전선에 지구를 장악하려는 음모에 나서고 싶겠는가. 기꺼이 탈영병이 되겠다. 잠시 동안은 출구를 찾기 위해, 하차하기 위해, 이미지 세계를 이용해야 할 것이다. 탈영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은 DJ로서의 예술가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DJ이다. 두터워진 기호적 언어의 껍질을 탈피하고, 키네스테틱(kinaesthetic)하고 촉각적(haptic)인 감각의 파동을 일으키는 생동하는 몸들의 군집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들일 존재이다.

본 기고글은 『frieze』 253호에 ‘DJ > Artist’라는 제목으로 처음 실렸다. 영-한 번역: 류다연.

메인 이미지: 줄리아나 헉스타블, ARTHRO ANARCHY (detail), 2024, acrylic and vinyl stickers on printed canvas, 152 ×115 × 4 cm (each). Courtesy: the artist and Project Native Informant, London; photograph: Stephen James

McKenzie Wark is the author, among other things, of Reverse Cowgirl (Semiotexte), Raving (Duke) and Love and Money, Sex and Death (Verso). She teaches at The New School in New York,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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